허목의 죽서루기 원문구두 및 현판 번역

 


허목의 죽서루기 원문구두 및 현판 번역 


허목(許穆, 1595~1682), 記言 卷13, 竹西樓記 

東界多名區。其絶勝八。如通川叢石亭,高城三日浦海山亭,䢘城永郞湖,襄陽洛山寺,溟州鏡浦臺,陟州竹西樓,平海越松浦。遊觀者獨稱西樓爲第一。何也。蓋濱海州郡關嶺以外。東盡大海。其外無窮。日月迭出。怪氣萬變。海岸皆沙。或匯爲大澤。或矗爲奇巖。或鬱爲深松。自習溪以北。至箕城南境。七百里。大體皆然。

죽서루기(竹西樓記)

관동(關東) 지방에는 이름난 곳이 많다. 그중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덟 곳인데, 통천(通川)의 총석정(叢石亭), 고성(古城)의 삼일포(三日浦)와 해산정(海山亭), 수성(䢘城 속초)의 영랑호(永郞湖), 양양(襄陽)의 낙산사(洛山寺), 명주(溟州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척주(陟州 삼척)의 죽서루, 평해(平海)의 월송포(越松浦)이다. 그런데 유람하는 사람들이 유독 죽서루를 제일로 손꼽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해변에 위치한 주(州)ㆍ군(郡)들이 대관령(大關嶺) 밖은 동으로 모두 큰 바다와 접해 있고 그 너머는 끝이 없으며, 해와 달이 번갈아가며 뜰 적에 괴이한 기상의 변화가 무궁하다. 해안은 모두 모래톱인데, 어떤 곳은 물이 고여 큰 못을 이루고, 어떤 곳은 기묘한 바위가 쌓여 있고, 어떤 곳은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되어 있는데, 습계(習溪) 이북에서 기성(箕城) 남쪽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이러하다. 


獨西樓之勝。隔海有高峯峭壁。西有頭陀,太白。巍峨巃嵸。浮嵐積翠。巖岫杳冥。大川東流。屈折爲五十瀨。間有茂林墟煙。至樓下。層巖蒼壁千尋。淸潭脩瀨。灣洄其下。西日。綠波潾潾。澹灎巖壁。別區勝槩。與大海之觀絶殊。遊觀者其樂此而云云者耶。

다만 죽서루의 경치는 동해와의 사이에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벼랑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두타산(頭陀山)과 태백산(太白山)이 우뚝 솟아 험준한데, 이내가 짙게 깔려 산봉우리가 아스라이 보인다. 큰 내가 동으로 흐르면서 꾸불꾸불 오십천(五十川)이 된다. 그 사이에는 울창한 숲도 있고 사람 사는 마을도 있다. 누각 아래에는 층층 바위의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맑은 못과 긴 여울이 그 밑을 휘감아 돈다. 석양이면 푸른 물결이 반짝이며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이곳의 빼어난 경치는 큰 바다의 볼거리와는 매우 다르다. 유람하는 자들도 이런 경치를 좋아해서 제일가는 명승지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


考官府故事。樓不知作於何代。而至皇明永樂元年。府使金孝宗。修廢墟起此樓。洪煕元年。府使趙貫。施丹雘。其後四十六年成化七年。府使梁瓚。重修之。嘉靖九年。府使許確。增作南檐。又其後六十一年萬曆十九年。府使鄭惟淸。復重修之。

관부(官府) 기록의 고사(故事)를 살펴보면 누대를 어느 때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명(明)나라 영락(永樂) 원년(1403)에 부사(府使) 김효종(金孝宗)이 옛터를 다듬어 죽서루를 세웠고, 홍희(洪煕) 원년(1425)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을 입혔다. 그 뒤 46년이 지난 성화(成化) 7년(1471)에 부사 양찬(梁瓚)이 중수하였고, 가정(嘉靖) 9년(1530)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 처마를 증축하였다. 또 그 뒤 61년이 지나 만력 19년(1591)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自太宗永樂元年癸未。至淸主康煕元年壬寅。爲二百六十年。樓下。古有竹藏古寺。樓有竹西之名。蓋以此云。仍誌之。以爲竹西樓記。

 명 태종(太宗) 영락 원년 계미년에서 청나라 강희(康煕) 원년 임인년(1662, 현종3)까지는 260년이 된다. 옛날에 누대 밑에 죽장사(竹藏寺)란 절이 있었는데, 죽서루라고 이름 붙인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하다. 이것을 기록하여 죽서루기로 삼는다.


今上顯宗三年 壬寅月日, 行都護府使, 許穆 記.

현종 3년 임인년(1662) 월 일에 행도호부사 허목(許穆, 1595~1682)이 기문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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