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의 보한집서 원문구두 및 문집 번역자료
최자(崔滋, 1188~1260), 補閑集, 補閑集序
文者蹈道之門, 不涉不經之語. 然欲鼓氣肆言, 竦動時聽, 或涉於險怪. 況詩之作, 本乎比興諷喩, 故必寓託奇詭, 然後其氣壯, 其意深, 其辭顯, 足以感悟人心, 發揚微旨, 終歸於正. 若剽竊刻畵誇耀靑紅, 儒者固不爲也.
최자(崔滋, 1188~1260), 《보한집(補閑集)》, 〈보한집(補閑集) 서(序)〉
문(文)이란 도(道)를 밟아가는 문으로, 떳떳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은 건너지 않는다. 그러나 사기를 고무시키는 과장된 말로 당시의 청자를 감동시키고자 할 때는 간혹 험하고 괴이한 말을 건너기도 한다. 하물며 시를 짓는 것은 비흥(比興)과 풍유(諷喩)에 근본 하므로 반드시 기특하고 괴이한 것에 의탁한 뒤에야 그 기상이 씩씩해지고 그 뜻이 깊어지고 그 표현이 드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미묘한 뜻을 드러내고, 끝내 바른 대로 돌아가게 하는 데 충분하다. 〈다른 사람의 것을〉 훔쳐 새기고 그려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유자(儒者)가 본디 하지 않는 것이다.
雖詩家有琢鍊四格, 所取者, 琢句鍊意而已. 今之後進, 尙聲律章句, 琢字必欲新, 故其語生, 鍊對必以類, 故其意拙. 雄傑老成之風, 由是喪矣.
시를 짓는 데 쪼고[琢] 다듬는[鍊] 사격(四格)이 있지만 사용한 것은 탁구(琢句)와 연의(鍊意)뿐이다. 지금의 후학들은 성률(聲律)과 장구(章句)를 숭상하여 글자를 쫄 때 반드시 새롭게 하고자 하여 말이 생소해지고, 대구를 다듬을 때 반드시 비슷하게 하고자 해서 그 뜻이 졸렬해진다. 웅장하고 성숙한 풍모가 이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다.
我本朝以人文化成, 賢儁間出, 贊揚風化. 光宗顯德五年, 始闢春闈, 擧賢良文學之士, 玄鶴來儀. 時則王融·趙翼·徐熙·金策, 才之雄者也.
우리 본조(本朝)는 인문(人文)으로 교화하고 성공하였으므로, 뛰어난 인재가 간혹 나와서 풍화(風化)를 칭찬하고 드러냈다. 광종(光宗) 현덕(顯德) 5년(958) 처음 춘위(春闈)를 열어 덕행과 재능이 있고 문(文)을 익힌 사람을 등용하니, 현학(玄鶴)이 날아온 의용이었다. 이때에 왕융(王融), 조익(趙翼), 서희(徐熙), 김책(金策)은 인재 가운데서도 빼어난 이들이었다.
越景顯數代間, 李夢游·柳邦憲以文顯, 鄭倍傑·高凝以詞賦進, 崔文憲公沖命世興儒, 吾道大行.
이어 경종(景宗)에서 현종(顯宗)의 몇 세대 사이에, 이몽유(李夢游)와 유방헌(柳邦憲)이 문(文)으로 현달하였고, 정배걸(鄭倍傑)과 고응(高凝)이 사부(詞賦)로 진출하였고,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이 세상에 이름났고 유학을 일으켜 오도(吾道)가 크게 성행하였다.
至於文廟時, 聲名文物, 粲然大備. 當時冢宰崔惟善, 以王佐之才, 著述精妙. 平章事李精恭·崔奭, 參政 文正·李靈幹·鄭惟産, 學士金行瓊·盧坦, 濟濟比肩, 文王以寧.
문종 때에 이르러 성명(聲名)과 문물(文物)이 찬란하게 갖추어졌다. 당시의 총재인 최유선(崔惟善)은 왕을 보좌할 만한 인재로서 저술이 정묘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이정공(李精恭)·최석(崔奭), 참정(參政) 문정(文正)·이영간(李靈幹)·정유산(鄭惟産), 학사(學士) 김행경(金行瓊)·노탄(盧坦) 같이 많은 이들이 어깨를 견주었고, 문종은 이들 덕분에 편안하였다.
厥後朴寅亮·崔思齊·思諒·李䫨·金亮鑑·魏繼廷·林元通·黃瑩·鄭文·金緣·金商祐·金富軾·權適·高唐愈·金富轍·富佾·洪瓘·印份·崔允儀·劉羲·鄭知常·蔡寶文·朴浩·朴椿齡·林宗庇·芮樂仝·崔諴·金精·文淑公父子·吳先生兄弟·李學士仁老·兪文安公升旦·金貞肅公仁鏡·李文順公奎報·李承制公老·金翰林克己·金諫議君綏·李史館允甫·陳補闕澕·劉沖基·李百順·兩司成咸淳·林椿·尹于一·孫得之·安淳之, 金石間作, 星月交輝. 漢文唐詩, 於斯爲盛.
그 뒤 박인량(朴寅亮), 최사제(崔思齊), 최사량(崔思諒), 이오(李䫨), 김양감(金亮鑑), 위계정(魏繼廷), 임원통(林元通), 황영(黃瑩), 정문(鄭文), 김연(金緣), 김상우(金商祐), 김부식(金富軾), 권적(權適), 고당유(高唐愈), 김부철(金富轍), 김부일(金富佾), 홍권(洪瓘), 인빈(印份), 최윤의(崔允儀), 유희(劉羲), 정지상(鄭知常), 채보문(蔡寶文), 박호(朴浩), 박춘령(朴椿齡), 임종비(林宗庇), 예락동(芮樂仝), 최함(崔諴), 김정(金精), 문숙공(文淑公) 부자, 오(吳)선생 형제, 학사(學士) 이인로(李仁老), 문안공(文安公) 유승단(兪升旦),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奎報), 승제(承制) 이공로(李公老), 한림(翰林) 김극기(金克己), 간의(諫議) 김군수(金君綏), 사관(史館) 이윤보(李允甫), 보궐(補闕) 진화(陳澕), 유충기(劉沖基), 이백순(李百順), 양사성(兩司成) 함순(咸淳), 임춘(林椿), 윤우일(尹于一), 손득지(孫得之), 안순지(安淳之) 등 금석(金石)같은 이들이 간간히 나왔고 별달[星月] 같은 이들이 서로 빛났다. 한문(漢文)과 당시(唐詩)는 이들에 의해 성행하게 되었다.
然而古今諸名賢, 編成文集者, 唯止數十家, 自餘名章秀句, 皆湮沒無聞. 李學士仁老略集成篇, 命曰破閑, 晋陽公以其書未廣, 命予續補. 强拾廢忘之餘, 得近體若干聯, 或至於浮屠兒女輩, 有一二事可以資於談笑者, 其詩雖不嘉, 幷錄之.
그런데 고금의 여러 명현들이 문집을 편찬한 것은 오직 몇십 가(家)에 그쳐서 나머지 좋은 문장이나 빼어난 시구들이 모두 없어져 알려지지 않았다. 학사 이인로가 간략히 모아서 책을 만들고서 『파한(破閑)』이라 명명하였는데, 진양공(晋陽公, 최우)이 그 책이 자세하지 않다고 여겨 나에게 계속해서 보완하게 하였다. 없어지고 잊혀진 것들을 억지로 수습하여 근체(近體) 약간 연을 얻었다. 때로는 심지어 승려, 아이, 여인들의 한 두 가지 일이라도 담소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그 시가 비록 훌륭하지 않아도 함께 기록하였다.
共一部分爲三卷, 而未暇雕板, 今侍中上柱國崔公, 追述先志, 訪採其書, 謹繕寫而進.
時甲寅四月日. 守太尉崔滋序.
합쳐서 1부(部)를 3권으로 나누었다. 아직 조판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시중 상주국(侍中 上柱國) 최공(崔公, 최항)께서 선조의 뜻을 잇고자 그 책을 찾기에 조심스럽게 잘 베껴 써서 올렸다. 때는 갑인년(1254) 4월 일이다. 수태위(守太尉) 최자(崔滋, 1188~1260) 서(序)하다.
고문서번역, 문집번역, 족보번역, 현판번역, 금석문번역, 기타 번역을 원하시면 연락처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